언어는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는데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우리나라 말이 속해있는 알타이어에는 '녹색'을 나타내는 단어가 없다고 한다. 즉 '파랗다' '푸르다'를 파란색과 녹색에 구분없이 쓴다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풀'에서 '푸르다'가 나온 것 같고 따라서 푸른색이 녹색 아니냐 하겠지만, '푸른 하늘' '파란 새싹' 같은 표현을 써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런 현상은 같은 알타이어인 일본어도 마찬가지다.


물론 수천 년 전 한자가 들어오면서 '녹색'이라는 한자어가 이 공백을 메워서 엄밀하게 풀의 색을 얘기해야 할 때는 녹색이라고, 하늘은 청색이라고 말하면 된다. 하지만 한자가 들어오기 전 알타이어를 쓰는 사람들은 녹색과 파란색에 대한 식별능력이 각 색을 나타내는 별개의 단어가 있는 사람들에 비해 둔감하지 않았을까.


사물의 이름에 대해서도 비슷한 예가 있다. 영어로 drop, bubble, foam은 각자 뚜렸이 구분되는 물리적 실체에 대한 이름이다. 즉 drop은 공 모양의 액체이고 bubble은 속이 빈 공 모양의 액체막이고 foam은 bubble이 여럿 모인 상태다. 그런데 우리말은 좀 애매하다. drop은 방울, foam은 거품인데, bubble은 방울이라고도 부르고 거품이라고도 부른다. 즉 우리말에서 거품은 '속이 빈 방울'이라는 뜻이 있어 비누거품을 비눗방울이라고 써도 된다. 그런데 방울은 공 모양의 형태에만 쓰므로 foam은 거품이지 방울은 아니다. 즉 방울은 개별 거품에 한해서 상위 개념이다.


왜 이렇게 번잡한 얘기를 하는가 하면 지금부터 거품의 물리학을 다룰 텐데 bubble과 foam을 둘 다 거품이라고 번역하면 헛갈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거품은 foam을 의미하고 구성단위인 bubble은 '비눗방울' 또는 '방울'이라고 이야기한다.


거품은 꺼질 운명의 존재

드라마에서 소주나 위스키를 마시는 장면은 자연스러운데 맥주를 마실 때는 영 어색하다. 유리잔에 보리차를 담았는지 연갈색 액체 위에 거품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잔에 맥주를 막 따르면 거품 층이 꽤 두꺼운데 잡담을 나누다 잔을 들면 거품이 많이 꺼져 있다. 거품을 이루는 방울이 터져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맥주를 잔에 따르는 것 같은 급작스러운 외부 교란으로 생성된 거품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기 마련이다. 거품이 있는 상태가 열역학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즉 액체는 표면적을 줄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이를 표면장력이라고 부른다) 표면적이 많이 늘어난 상태인 거품이 꺼지는 것이다. 순수한 물은 세게 저어도 거품을 만들기가 어렵다. 물분자의 표면장력이 워낙 커서 거품이 만들어지자마자 깨지기 때문이다. 반면 비누나 샴푸, 맥주 같은, 표면장력을 낮춰주는 계면활성제가 녹아있는 수용액은 거품도 잘 생기고 오래 유지된다.

물리학자들은 오래전부터 거품의 구조와 시간에 따른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거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구조를 볼 수 있는데, 즉 인접한 비눗방울들은 막(lamella)을 공유하고 있고 막 3개가 만나는 선분이 있다(막 2개나 4개 이상이 만나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막사이의 각도는 120도 내외다. 또 선분 4개가 한 점에서 만난다(역시 3개나 5개 이상이 만나는 경우는 없다). 이 선분을 '플라토 경계(Plateau border)', 이런 관계를 '플라토 법칙(Plateau's laws)'이라고 부르는데, 이 현상을 발견한 19세기 벨기에의 물리학자 조셉 플라토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렇다면 거품은 어떤 과정을 통해 꺼질까. 비눗방울로 이뤄진 거품을 자세히 보면(면도 거품이나 카푸치노 거품은 너무 작아서 이런 현상이 안 보인다) 투명한 막 표면에서 무지개색이 일렁 거린다. 이런 무지개색은 색소 때문에 나타나는 게 아니라 빛이 막을 투과하고 반사할 때 일어나는 간섭 때문이다. 즉 바깥쪽 막에서 바로 반사하는 빛과 막을 통과한 뒤 안쪽 막에서 반사한 빛이 보강간섭을 하는 파장의 색이 보이는 것이다. 비누막에서 색이 일렁거리는 건 막의 두께가 변하면서 보강간섭을 파는 파장이 바뀌기 때문이다.

즉 거품은 액체막이 공기를 분할한 상태인데 막을 이루는 액체가 중력과 표면장력을 받아 아래로 흐르면서 막이 얇아지고 결국은 터지는 것이다. 물론 물리학자들은 이런 기본 메커니즘은 벌써 파악했지만 지금까지도 거품이 터지는 정확한 메커니즘은 밝히지 못한 상태였다. 즉 컴퓨터 그래픽으로 거품이 터지는 장면을 재현하려면 동영상의 각 프레임을 일일이 그려 이어 붙여야 한다는 말이다.



거품이 꺼지는 과정 3단계 해석

그런데 과학저널 '사이언스' 2013년 5월 10일자에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의 수학자들이 거품이 꺼지는 과정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수식(미분방정식)을 만들었다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즉 이 수식의 변수에 특정한 값(액체밀도, 표면장력 같은)을 지정해주고 초기 조건을 정해주면 시간 경과에 따른 거품의 변화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는 것. 앞으로는 영와 CG에서 거품 장면을 연출할 때 엄청난 수작업을 안 해도 된다는 말이다.

연구자들은 거품의 변화과정을 3단계로 나눴다. 첫 번째가 재배치기로 비눗방울 하나가 터진 뒤 불안정해진 거품 구조가 재배치되면서 안정을 찾는 단계다. 두 번째가 액체배수기로 겉보기에는 거품이 안정한 상태인 것 같지만 막의 물이 빠져나가면서 막이 얇아지는 단계이다. 세 번째가 파열기로 얇아진 막이 터지면서 거품 구조의 균형이 깨진다. 이후 다시 첫 번째 단계로 돌아가 사이클이 반복된다.

이처럼 거품의 진화를 3단계로 나눈 건 모든 요소를 한꺼번에 고려할 경우 너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단계별로 변화를 재현할 수 있는 수식을 만든 뒤 이를 매끄럽게 이어 붙여 실제 현상에 가깝게 재현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을 만들어낸 것. 

연구자들은 이렇게 검증한 수식으로 다양한 상황에서 거품이 꺼지는 과정을 시뮬레이션했다. 막 위에 떠있는 거품이 소멸하는 과정을 시뮬레이션 한 것으로 막의 두께에 따라 다른 색으로 표시해 두께 변화도 한 눈에 볼 수 있다. 즉 크고 작은 비눗방울 17개로 이뤄진 거품에서 먼저 막이 얇은 작은 비눗방울들이 터진다. 막이 터질 경우 원래 플라토 경계였던 자리의 막이 두꺼워짐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작은 방울이 터져 합쳐질 때의 급격한 요동으로 큰 방울이 터지기도 한다. 마직막 장면은 거품을 이루고 있던 방울들이 서로 떨어져 결국 네 개의 방울만 남은 상태를 보여준다.

영화 CG는 이런 식으로 거품을 재현할 것이다. 막의 두께가 일정한 비눗방울 27개가 모인 거품으로 출발했는데, 막을 이루는 액체가 빠져나가면서 6.4초일 때 첫 방울이 터지고 뒤이어 급격히 방울이 터지면서 거품이 꺼진다. 첫 방울이 터지고 비눗방울 3개가 남아있는데 걸린시간은 불과 0.2초가 걸렸다.

액체의 표면에 머무르다 하나둘 터지며 사라지는 거품. 그러나 몇몇 과학자들은 끈질기게 거품의 내면을 들여다봤고 마침내 놀라운 통찰력으로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거품의 진화 과정을 몇 개의 수식으로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거품은 덧없는 존재일지 모르지만 거품의 물리학은 영속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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